버추얼 아이돌

'이터니티(ETERN!TY)',

'DTDTGMGN' 뮤직비디오

조회수 600만 돌파

4인조지만 8인조, 현실에는 없는 ‘가상 아이돌’ 등장 - 중앙일보

[SPECIAL REPORT]
가상 인간이 온다


한 자리에 모인 에스파 완전체. [사진 각 사]

한 자리에 모인 에스파 완전체. [사진 각 사]


지난달 11일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 무대에 오른 걸그룹 에스파(aespa). 열창 중인 네 명의 멤버 사이에 갑작스레 또 다른 멤버 네 명이 등장한다. 이내 대열을 맞춰 마치 한 그룹처럼 짜인 군무를 추다가 돌연히 사라진 멤버들. 이들은 ‘광야’라는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에스파의 멤버 ‘아이 에스파’(æ-aespa)다. 오프라인 무대에선 4명의 멤버가 춤을 추고 있었지만, 온라인에서는 8명의 ‘에스파 완전체’가 공연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실시간 생방송에서 이들이 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현실의 무대 위에 3차원 가상 이미지를 덧입힌 증강현실(AR) 기술 덕분이다. 연출을 담당한 박찬욱 CJ ENM CP는 “코로나19로 오프라인에 많은 관객을 모시지 못한 점을 고려해 온·오프라인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기획했다”며 “에스파의 세계관에 맞는 매개체를 활용한 기술로 전 세계 시청자들이 마치 현장에서 공연을 본 듯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시·공간 제약 없어 잠재력 무궁무진”

24년 전 사이버 가수 ‘아담’에서 시작된 가상 아이돌이 다시금 부활한다. 당시 ‘반짝 스타’에 불과했던 아담을 뛰어넘어 현실과 가상 세계에서 동시에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아이돌을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다. 아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이버 가수가 등장했지만 가상 인간이 다인조의 그룹이나 핵심 멤버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과거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를 창조해 가수로 만들었다면, 최근에는 실제 인간을 기반으로 한 가상 아이돌 개발까지도 확장돼 시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가상 인간과 아이돌의 접목에 적극적으로 나선 건 SM엔터테인먼트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2019년 한 세미나에서 “미래 세상은 셀러브리티와 아바타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약 1년 후 이를 증명하듯 걸그룹 에스파가 수면 위로 등장했다. 가상세계에 제2의 에스파가 존재한다는 콘셉트는 데뷔 당시 낯설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멤버들이 기획에 참여하면서 점차 그룹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CG 소프트웨어 기업인 에프엑스기어는 그룹 BAE173과 손잡고 디지털 아이돌 프로젝트 ‘나랑(NARANG)’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나랑’은 사용자가 아이돌의 의상과 메이크업을 골라주고, 함께 공부하는 등 정해진 동작만 반복하는 가상 인간과 달리 실시간 상호작용이 가능한 서비스다. 에프엑스기어 관계자는 “가상 아이돌을 어설프게 작업하면 사용자들이 불쾌한 골짜기를 경험할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 멤버 여름. [사진 각 사]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 멤버 여름. [사진 각 사]


사이버 가수의 흥행 실패로 주춤했던 순수 가상 아이돌 시장도 활력을 얻고 있다. AI 그래픽 전문기업 펄스나인이 개발한 걸그룹 ‘이터니티(Eternity)’가 대표적이다. 펄스나인은 자사 기술인 딥리얼 AI를 활용해 지난해 3월 11인조 가상 걸그룹을 제작했다. 101명의 AI 얼굴을 개발한 후 서바이벌 투표를 받아 얼굴, 성격, 매력 등을 설정했고, 음원과 뮤직비디오, 커버 영상 등을 선보였다. 펄스나인 관계자는 “현실의 아이돌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시·공간의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고 타 콘텐트와의 결합력도 높아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전했다. 데뷔 당시 “어색하다”는 댓글이 주를 이뤘던 것과 다르게 최근 영상에는 “진짜 사람 같다”는 댓글이 쇄도하고 있다.

“캐릭터 더 자연스러워져야 인기 끌 것”


BAE173의 도현을 디지털로 구현했다. [사진 각 사]

BAE173의 도현을 디지털로 구현했다. [사진 각 사]


가상인간 개발사들이 아이돌 시장에 뛰어든 본질적인 이유는 아이돌이 가상 인간의 ‘최고봉’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이돌 특성상 몸짓, 행동, 말투 하나하나까지 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디테일에 소홀하면 금방 거부감을 줄 수 있기에 제작 과정이 훨씬 까다롭다. 에프엑스기어 관계자는 “가상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영역이지만 그만큼 차별성이 있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장”이라며 제작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아직까진 미적지근한 상태다. 메타버스 시대에 맞춰 진화한 가상 아이돌이 새롭게 느껴지지만, 기존의 아이돌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셀링 포인트는 부족해서다. 에스파 팬인 서모(28)씨는 “사랑 얘기만 하던 아이돌 가사에 가상인간이 등장하는 게 오글거리지만 재밌다”면서도 “하지만 팬들은 에스파 멤버 4명을 좋아하는 것이지, 가상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손영민(22)씨는 “SM엔터테인먼트의 세계관에 익숙해서인지 독창적인 콘셉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며 “가상인간 아이돌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향후 캐릭터가 더 자연스러워진다면 어느 정도는 인기를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도 가상 아이돌의 흥행에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박 평론가는 “입력된 값을 출력하는 가상 아이돌과 시시각각 팬들과 소통하고 반응하는 아이돌은 분명 차이가 있다”며 “가상 아이돌 수요가 많았던 일본과는 달리 국내에서 가상 아이돌이 자리 잡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7326